[기고]동보항공-이인재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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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2.07.12 14:06   수정 : 2012.07.12 14:06
나와 6.25(12)

궁핍한 나날

며칠 후, 새해가 되었다. 1951년.
이미 쌀이 떨어져, 두끼 끼니 마련이 절박하던 우리에게 새해라고 하여 특별히 좋아질건 아무것도 없었고, 배부르지도 않은 나이만 한살씩 더 먹었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일곱살(만 5세), 할아버지는 60세, 할머니는 62세, 아버지는 31세, 어머니는 29세. 막내 삼촌과 사촌형, 누나는 모두 10대였으니 어디 나가 벌이를 할 나이는 아니었다.
아버지도 학벌이나 기술, 연고로서는 벌이가 어렵긴 마찬가지였으나, 열 식구의 생계를 위해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아니, 배고파 우는 두 동생과 젖이 모자라 고민하는 엄마를 차라리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갔어야 했을 것이다.
며칠에 한번씩 아버지는 밤에만 들어 오셨다. 들어오실 때마다 누런 포대에 몇 되 분량의 쌀(백미가 아니라 보리, 밀, 강냉이, 감자 등)을 갖고 오셨다.
아버지는 이를 벌기 위하여, 길거리에서건 장터에서건 지겟짐을 지고 가는 사람만 있으면 지게를 뺏다시피해 대신 짐을 지어주곤 쌀을 조금씩 받았다고 한다.
우리 식구들은 점차 말을 잃어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북에 있을 때는 밖에 나가 동무들과 떠들며 놀았으나, 졸지에 그 많은 동무들을 모조리 잃어버려 같이 놀 상대가 없어졌고, 집안에서도 옛 같으면 공연히 울고 떼를 쓰면 누군가가 와서 달래주곤 했는데, 이젠 울고 떼써서 될 일이 없어진 것이며, 어쩐지 그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전쟁이 발발한지도 벌써 일곱달 째. 그새 양 진영의 전사, 부상, 실종자 및 포로 등, 인명 피해는 셀 수없는 정도였다.
직접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민간인들의 피해 또한 막심하였다. 격전지 인근 주민들은 물론, 거의 남한 전역이 유례없는 고난을 당했다. 남한 전역이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 고생은 잽도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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