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재 부회장의 ‘나와 6.25’ (1)
‘쌕쌔기’
남부전선에서 대규모 동족 살륙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흥남에서 살고 있던 6살의 일자 무식꾼인 나는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TV나 신문도 없었거니와, 우린 국제 국내정세의 변화에 때맞춰 살아가는 생활수준이 아니었다.
쬐끄만 땅마지기에 밭농사 지으시는 할아버지, 비료공장 하급 노동자이신 아버지, 이름도 없이 성씨 한자만 가지신 할머니 (윤씨), 국민학교도 못나왔으면서도 벌써 세 아이를 키우시는 어머니, 국민학교 졸업후 할아버지 농사를 돕고 있는 10 대의 삼촌. 시집간 고모는 무슨 행상이었는데, 가끔씩 들릴때면 생선이나 과일을 가져와 할머니에게 드렸고, 어쩌다 어머니와 같이 찾아가는 외조모는 홍원 어시장의 생선장수였다.
모든 식구들의 벌이를 다 합쳐도 웬만한 도시 회사원의 한사람 수입도 안되었지만, 식구들은 모두 제각기 바빴고, 모여서 대화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나는 어머니와 같이 집에 있는 시간이 비교적 많았으나, 어머니의 가사 활동량 (밥짓기, 빨래, 청소, 곡식 말리고 거두고 보관하기,어린 두동생 보기 등등)이 많아, 역시 오손도손 대화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가끔씩 어른들끼리 모여 뭔가 수근거리는 소리를 듣고, 또는 밖에 나가서 뭔가 심상치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감을 잡았으나, 나라와 민족,가정과 나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사변이 이미 터졌다는 것은 아직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6.25 전쟁을 체감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가을이었다.
9월인가, 10월 어느날, 맑고 푸른 흥남 하늘에 은빛 날개의 괴 비행체가 나타난 것이다.
날것이라고는 참새와 잠자리밖에는 본적이 없는 우리에게 그 비행체는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도대체 어쩜 저렇게 요란하고 빠르단 말인가 ?
그것이 북한 공군기의 킬러인 미군 전투기였다는것 따위는 알리없는 우리는, 그 비행체의 소리를 따라 ‘쌕쌔기’ 라고 불렀다.
우린 북한 공군기와 미군 쌕쌔기의 공중전을 목격하지는 못하였다.(북한 공군은 이때 이미 전멸상태였다.) 다만, 그 비행기의 폭음과 곡예비행에 빠져 하늘을 쳐다보는게 전부였다.
우리는 달릴때에도 팔을 뒤로 뻗치고 쌕쌔기 폼으로 달리곤 하였다.
그러나, 어른들은 우리더러 쌕쌔기 구경을 못하게 했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속히 지하 방공호로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면, 땅에 엎드려 눈과 귀를 가리라고 하였다.
우린 대체로 시키는대로 하였으나, 논두렁에서 비행기를 만날때는 땅에 엎드리면서도 실은 비행기의 나는 모습을 쳐다보기에 바빴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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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화물업계의 원로인 동보항공의 이인재 부회장은 함경남도 흥남출신이다. 이 부회장은 본인이 직접 겪은 6.25의 비극을 생생하게 전했는데 본지가 이 부회장의 허락을 얻어 이번 호부터 연재하게 됐다. 오늘을 사는 젋은 국제물류인들에게 60주년을 맞이한 6.25의 비극을 되새기자는 취지다. (원문을 다소 편집했음)
‘쌕쌔기’
남부전선에서 대규모 동족 살륙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흥남에서 살고 있던 6살의 일자 무식꾼인 나는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TV나 신문도 없었거니와, 우린 국제 국내정세의 변화에 때맞춰 살아가는 생활수준이 아니었다.
쬐끄만 땅마지기에 밭농사 지으시는 할아버지, 비료공장 하급 노동자이신 아버지, 이름도 없이 성씨 한자만 가지신 할머니 (윤씨), 국민학교도 못나왔으면서도 벌써 세 아이를 키우시는 어머니, 국민학교 졸업후 할아버지 농사를 돕고 있는 10 대의 삼촌. 시집간 고모는 무슨 행상이었는데, 가끔씩 들릴때면 생선이나 과일을 가져와 할머니에게 드렸고, 어쩌다 어머니와 같이 찾아가는 외조모는 홍원 어시장의 생선장수였다.
모든 식구들의 벌이를 다 합쳐도 웬만한 도시 회사원의 한사람 수입도 안되었지만, 식구들은 모두 제각기 바빴고, 모여서 대화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나는 어머니와 같이 집에 있는 시간이 비교적 많았으나, 어머니의 가사 활동량 (밥짓기, 빨래, 청소, 곡식 말리고 거두고 보관하기,어린 두동생 보기 등등)이 많아, 역시 오손도손 대화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가끔씩 어른들끼리 모여 뭔가 수근거리는 소리를 듣고, 또는 밖에 나가서 뭔가 심상치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감을 잡았으나, 나라와 민족,가정과 나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사변이 이미 터졌다는 것은 아직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6.25 전쟁을 체감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가을이었다.
9월인가, 10월 어느날, 맑고 푸른 흥남 하늘에 은빛 날개의 괴 비행체가 나타난 것이다.
날것이라고는 참새와 잠자리밖에는 본적이 없는 우리에게 그 비행체는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도대체 어쩜 저렇게 요란하고 빠르단 말인가 ?
그것이 북한 공군기의 킬러인 미군 전투기였다는것 따위는 알리없는 우리는, 그 비행체의 소리를 따라 ‘쌕쌔기’ 라고 불렀다.
우린 북한 공군기와 미군 쌕쌔기의 공중전을 목격하지는 못하였다.(북한 공군은 이때 이미 전멸상태였다.) 다만, 그 비행기의 폭음과 곡예비행에 빠져 하늘을 쳐다보는게 전부였다.
우리는 달릴때에도 팔을 뒤로 뻗치고 쌕쌔기 폼으로 달리곤 하였다.
그러나, 어른들은 우리더러 쌕쌔기 구경을 못하게 했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속히 지하 방공호로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면, 땅에 엎드려 눈과 귀를 가리라고 하였다.
우린 대체로 시키는대로 하였으나, 논두렁에서 비행기를 만날때는 땅에 엎드리면서도 실은 비행기의 나는 모습을 쳐다보기에 바빴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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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화물업계의 원로인 동보항공의 이인재 부회장은 함경남도 흥남출신이다. 이 부회장은 본인이 직접 겪은 6.25의 비극을 생생하게 전했는데 본지가 이 부회장의 허락을 얻어 이번 호부터 연재하게 됐다. 오늘을 사는 젋은 국제물류인들에게 60주년을 맞이한 6.25의 비극을 되새기자는 취지다. (원문을 다소 편집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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