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재 부회장의 ‘나와 6.25’ (18)
다시만난 가족
그런데,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행방불명되었던 삼촌과 형이 나타난 것이다 !
낙담하고 있던 할머니는 기뻐서 어쩔줄 모르시는데, 이 와중에서도 할아버지는 아이들 야단치시는걸 잊지 않으신다.
“야, 이 간나새끼들아, 어디메르 돌아 댕기다가 인재- 오니?”.
삼촌의 설명에 따라 재구성하면 이렇다.
당시 탑승구에서 헤드 카운팅하던 일본인은 카운팅 편의상 일열 종대로 탑승할 것을 요청, “이찌레쯔니 나란데…(한줄로 나란히)”라고 계속 외쳤으나, 이를 못들은 삼촌과 형은 괴나리 봇짐에 작대기를 꿰어들고 둘이 옆으로 나란히 들어오다가 그만 걸린 것이었다.
당시엔 인민군들이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첩자 노릇을 많이 하던때라, 두 소년은 곧장 연행되어 이틀간 조사를 받고 풀려나온 후, 온 배를 뒤져 이제야 식구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조사 중에도 식사 제공을 받아 배는 곯지 않았다고 하였다.
노약자뿐이던 우리 식구들은 이제 젊은 식구들을 찾아, 몸은 고단하였으나 정신적으로는 큰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흘째 되던 밤, 우리는 하선 명령을 받았다.
드디어, 대한민국 땅을 밟게된 것이다.
우리 앞에 CIQ 는 없었고, 마중 나온 사람도 물론 없었다. 나는 이때 잠들어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깜깜한 들판에 보리 낱가리들만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동서남북도 모르고 추위에 떨던 우리 피난민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모두들 그 보리 낱가리 속에 몸들을 처박고 겨울밤의 추위를 피하였다.
그곳은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이라는 곳으로서, 나중에 거대한 포로 수용소가 들어선 근방이었다.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겨울날, 우리 가족과 수많은 동향 피난민들은 이렇게 대한민국에서의 첫날밤을 보낸 것이었다.
다시만난 가족
그런데,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행방불명되었던 삼촌과 형이 나타난 것이다 !
낙담하고 있던 할머니는 기뻐서 어쩔줄 모르시는데, 이 와중에서도 할아버지는 아이들 야단치시는걸 잊지 않으신다.
“야, 이 간나새끼들아, 어디메르 돌아 댕기다가 인재- 오니?”.
삼촌의 설명에 따라 재구성하면 이렇다.
당시 탑승구에서 헤드 카운팅하던 일본인은 카운팅 편의상 일열 종대로 탑승할 것을 요청, “이찌레쯔니 나란데…(한줄로 나란히)”라고 계속 외쳤으나, 이를 못들은 삼촌과 형은 괴나리 봇짐에 작대기를 꿰어들고 둘이 옆으로 나란히 들어오다가 그만 걸린 것이었다.
당시엔 인민군들이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첩자 노릇을 많이 하던때라, 두 소년은 곧장 연행되어 이틀간 조사를 받고 풀려나온 후, 온 배를 뒤져 이제야 식구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조사 중에도 식사 제공을 받아 배는 곯지 않았다고 하였다.
노약자뿐이던 우리 식구들은 이제 젊은 식구들을 찾아, 몸은 고단하였으나 정신적으로는 큰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흘째 되던 밤, 우리는 하선 명령을 받았다.
드디어, 대한민국 땅을 밟게된 것이다.
우리 앞에 CIQ 는 없었고, 마중 나온 사람도 물론 없었다. 나는 이때 잠들어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깜깜한 들판에 보리 낱가리들만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동서남북도 모르고 추위에 떨던 우리 피난민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모두들 그 보리 낱가리 속에 몸들을 처박고 겨울밤의 추위를 피하였다.
그곳은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이라는 곳으로서, 나중에 거대한 포로 수용소가 들어선 근방이었다.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겨울날, 우리 가족과 수많은 동향 피난민들은 이렇게 대한민국에서의 첫날밤을 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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